인니뽄 매거진 : 일본 관료제도의 양면을 만들어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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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08월26일 10시40분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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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료제도의 양면을 만들어낸 인물
오오쿠보 도시미치


Prologue – 일본 관료의 특징들

 

관료제도와 그것이 만들어 내는 관료의 의식 상태는 한 국가의 제도와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일본 관료의 경우 강한 엘리트 의식과 책임감이 있다. “우리가 주도하지 않으면 일본은 잘 될 수 없다는 식의 생각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갖는다.

 

일본인들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면관공서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혹은공무원이 더 자주 감독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들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한 정당한 의미부여이고 또한 공무원 스스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다.

 

또한 그들 역시 평소에는 열심히 일하고 자부심도 강하지만 한편으로는민간에게 맡겨놓으면 일이 변변치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관료들이 은연 중에 국민들을 우습게 본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뿌리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오오쿠보 도시미치라는일본의 관료 주도제를 만들어낸 인물을 만날 수 있다.

 

 보호받는 일본의 공급자들

 

또하나 살펴봐야 할 것은 관료기구의 역사와 기능이다. 일본 관청의 상당수는 각 분야의 인재나 기업을 기르는 근대기능 육성 기관을 자임해왔다. 그것도 단지 육성하는 것 만이 아니라고 각 분야마다 협조 체제를 만들어내 규격기준을 철저히 가르치려는 의욕과 권력에 대한 불타는 지향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한편으로 관공서의 각종 규제로 인해 신규 시장 진입자들이 저지당하게 되고 경쟁으로부터 업계의 이익을 지켜주는 꼴이 된다. 당연히 규제완화를 하려고 하면 모든 사업자가 일제히 이를 반대하게 되는 것이다.

 

관료들이 특히 강하게 주도했던 분야는 교육, 의료, 건설, 운수, 통신 등이다. 이 분야들은 외국과의 경쟁에 노출될 위험이 거의 적다. 그러니 관공서와 사업자의 합의하에 얼마든지 고비용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자동차, 전기 등의 제조업도 비록 국제경쟁이 격화되는 상태였지만 유통의 규제로 인해 상당한 혜택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결국 그간 일본은소비자보다 공급자를 우선시 하는제도가 이어져 왔고 이는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공급자 우선의 관료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당시 오오쿠보 도시미치가 만들어낸 관료 시스템이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서른, 비상이 시작되다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에도 말기인 1830년에 현 카고시마현에서 무사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 때기록소서역조의 서기가 되었다. 이는 그가 그만큼 읽기, 쓰기와 주판실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부친이 해당지역에서 추방되는 불운을 겪으면서 그 자신도 직업을 잃어야 했다. 21세부터 24세까지 그렇게 직업이 없던 그는 1857, 28세에 보병대 하사관이 된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2년 뒤인 30살 때부터 본격적인 비상이 시작된다. 그는 바둑을 계기로 한 지방 영주의 부친에게 접근했고 이를 통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 후 그는 에도막부 시절 회계를 담당하면서 관료 세계에 뛰어 들었고 개혁에도 열심이었다. 그 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고 신 정부가 생기면서 그는 1871년 드디어 재무대신이 될 수 있었다.

 

▶ 오오쿠보의 재기발랄한 국가 건설 계획

 

그가 메이지시대에 원했던 것은 외국에 침략되지 않고 또 업신여김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일본의 산업을 일으키고 나라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일본을 발전시킬 것인가는 고민일 수 밖에 없었다. 에도막부 말기 당시 외국의 함선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드디어 외국과의 소통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보는 영국으로부터 시작되어 네덜란드를 통해 경유되어 들어오는 것들이었다. 소통은 있었지만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던 중에 유럽에 가게된 오오쿠보는 패기에 불타는 신흥제국인 독일을 볼 수 있었다. 당시 독일은 영국의 근대화에 대해 잘 아는 엘리트 관료와 대학 교수를 모아 규격을 정하고 지도를 하면서 산업화를 주도했다. 이른바관료주도형 계몽주의가 독일제국의 기본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오쿠보는 이를 목도하고는바로 이것이다라고 무릎을 쳤다.

                                                 www.cc.matsuyama-u.ac.jp

일본으로 돌아온 오오쿠보는 박람회를 개최했다. 외국의 우수한 기술을 들여와 국민에게 보여주고 이를 산업화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정부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이런식으로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메이지의 관료제도에 의해관료는 아는 것이 많고 훌륭하다는 인식이 퍼지는 것과 동시에 관료들 사이에서는국민은 무지하다. 그러니 우리가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생각이 싹텄다. 관료는 기술을 가르쳐 주고 민간인은 그 손발이 되면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품의 종류나 규격, 시설의 기준, 노동시간이나 공용제도 등 모든 것은 공무원이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일으켜진 근대 산업은 이제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악랄한 상인에 착취되지 않도록 관료나 부현지사가 설치되고 범죄를 단속하기 위해 사법경찰이 생겼다. 일본이 근대 공업국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자 근대적인 행정체제를 갖춘 국가로 변하는 시기였다.

 

▶ 나 아니면 안될텐데

 

그런데 오오쿠보가 채용한 독일형 관료제도는 많은 이점과 함께 중대한 결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관료를 통제할 수 있는 거물 정치인이 사라지면 제각각 자기 주장만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문부성은 교육만을 생각하고 통산성은 산업 육성만을 생각한다. 농림수산성, 건설성, 후생성, 모두 자신의 업계만을 생각해 상호 조정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특히 관료들은 누구보다 일을 열심히 했기에 그들의 열정을 막는 것도 쉽지 않았다. 또한 관료들의 자부심은 하나의 폐해가 되기도 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 ‘민간에게는 맡길 수 없다라는 의식은 자신들의 권한을 늘리게 하고 규제를 강화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관료들은 늘 극단적인 소수의 예를 통해 규제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편리는 사라지고 효율이 높아지지 않는다. 국민들에게는 자꾸만 세상이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일본의 관료제도의 기초를 쌓아 전반적인 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인들이 불편해 하는 많은 것들이 그의 시대에 만들어진 것도 사실이다. 규제가 많으니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이다.

                               blogs.yahoo.co.jp/mimi12wondergirl

 ‘국가는 부유해져도 개인은 행복해질 수 없는 일본을 만든 것이 또한 그이기도 하다. 오늘날 일본의 좋은 점에서도, 혹은 나쁜 점에서도 오오쿠보는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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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철 기자 (kim@innipp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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